1884년 1월 6일, 수도사로 평생을 헌신하며 살았던 브루노의 수도원장 그레고어 멘델이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숭고한 인격자', '따뜻한 마음의 친구', '모범적인 성직자'를 잃었다며 슬퍼했다. 그러나 당시 아무도 그의 진짜 업적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수도사였던 멘델은 어떻게 유전학의 아버지가 된 것일까?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 오늘 포스팅 주제는 바로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 1822-1884)'이다.
멘델은 1822년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살이 되던 해 오파바의 김나지움에 입학했고, 18살이 된 후에는 올로모츠의 철학원에서 2년간 대학 준비를 했다. 하지만 멘델의 학교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학비가 항상 부족했던 것이다.
부족한 돈을 메꾸기 위해 멘델은 틈틈이 과외를 하며 학비와 용돈을 벌었다.
게다가 멘델이 16살이 된 무렵에는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 집안이 폭삭 주저앉을 위기도 맞이한다. 깊은 좌절감에 빠진 멘델은 결국 병을 앓게 되었고,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가 한동안 요양생활을 했다.
다행히 누나와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몸을 회복하고 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긋지긋한 학비와 생계에 대한 걱정을 때려치우고 싶었던 멘델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철학 공부를 이제 그만 마치고 생존을 위해 투쟁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야겠다."
결국 그가 향한 곳은 브루노에 있는 성 도마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이었다.
21살 청년 멘델은 수도원의 수련수사로 들어갔고, '그레고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수도원은 '세상과 단절된 고립된 곳'이 아니었다. 수도원에는 식물학자, 광물학자, 천문학자, 자연과학자, 철학자, 수학자 등 많은 스승들이 있었고, 수도사들은 지역 학교 교사로 일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스승 아래 생계 걱정에서 벗어난 멘델은 편한 마음으로 자연과학 공부를 꾸준히 이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멘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1849년 대수도원장의 추천으로 인근 학교에서 교사로 일을 하게 됐는데, 멘델의 자연과학에 대한 열정과 깊은 지식을 본 수도원장은 멘델을 대학으로 보낸다.
29살의 나이로 조금 늦은 나이였지만, 꿈에 그리던 대학생활이 펼쳐졌다. 멘델은 대학에서 생리학과 세포학의 대가인 '웅거'와 저명한 식물학자 '네겔리' 그리고 도플러 효과를 발견한 '도플러' 등 과학계의 대가들을 만나며, 최신 과학과 방법론 등을 배우게 된다.
공부를 마치고 수도원으로 돌아온 멘델은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유전의 비밀을 풀기 위한 거대한 실험을 계획했다.
멘델이 살던 때는,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가 만나면 회색 고양이가 나온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유전에 대한 이론은 부모가 가진 특징이 굉장히 랜덤하게 혼합되어 자식에게서 나타난다는 설이 전부였다.
멘델은 유전의 비밀이 궁금했다.
그래서 멘델이 유전을 연구하기 위해 특별히 선택을 한 것은 바로 완두콩이었다.
처음에는 쥐를 이용한 실험을 계획했지만, 수도원에서는 쥐의 교배 실험을 금지했기 때문에, 식물로 실험 대상을 바꿔야 했다.
사실, 그 당시 환경에서는 완두콩은 쥐보다 훨씬 완벽한 실험 대상이었다. 완두콩은 일단 싸고, 쉽게 기를 수 있고, 잘 자란다. 한 번에 많은 콩들을 얻을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대립되는 형질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노란색 콩과 초록색 콩, 둥글둥글한 모양과 쭈글쭈글한 모양, 자주색 꽃과 하얀색 꽃, 게다가 수도원에는 멘델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넓은 정원이 있어, 완두콩 실험을 하기 최적의 장소였다.
멘델은 1856년부터 무려 7년에 걸쳐 완두콩을 심고 교배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멘델은 둥근 콩 대 쭈글 콩 같이 1:1로 대립하는 7가지 성질을 나열하였고, 각 형질이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해 지는가를 관찰했다.
둥근 콩과 주름진 콩을 교배하니, 모두 둥근 콩이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나온 둥근 콩만 가지고 둥근 콩끼리 다시 교배했을 때에는 둥근 콩이 3, 주름진 콩이 1의 비율로 나왔다.
각기 다른 형질에서도 3:1의 비슷한 비율이 계속해서 나왔는데, 멘델은 콩 속의 특정 인자가 '둥근 모양'과 '주름진 모양'을 결정한다고 추측했다. 멘델은 콩을 심고 콩이 열리면, 다시 그 콩을 심고 또 콩이 열리고를 반복해서 약 3만 개의 콩을 분석했다.
그 결과를 통계적으로 종합 분석해본 결과, 3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첫 번째는 둥근 콩 대 쭈글쭈글한 콩, 노란 콩 대 초록 콩처럼, 대립되는 형질의 콩 두 개를 교배하면, 둘 중 하나만 계속해서 나온다는 사실을 통해 우성과 열성 형질로 나뉜다는 것이다. 바로 '우열의 법칙'
두 번째는 둥근 콩을 만드는 유전자와 쭈글쭈글한 콩을 만드는 유전자는 각각 따로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 둥근 콩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노란색, 초록색을 결정하는 유전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독립의 법칙까지 발견했다.
멘델이 발견한 이 세 가지 법칙을 통해 유전학의 기틀이 세워졌다. 멘델은 이 실험 결과를 정리해 1866년 브루노의 자연과학협회에 '식물의 잡종에 대한 실험'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놀라운 발견에 멘델은 신이 나서 이 논문의 사본 40부를 만들어 유럽 각지의 저명한 과학자들에게도 보냈다. 그중에는 진화론의 아버지 다윈도 껴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누구도 수도사 멘델의 논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몇몇 과학자들은 봉투를 뜯지도 않았다.
멘델은 자신의 연구결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멘델은 죽기 전 동료에게
"비록 나의 업적이 현재 세상에 인식되지 않고 있으나, 머지않아 전 세계에 그 가치가 알려지리라 확신한다."
라고 말했다.
비록 과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1868년 수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사회적 지위는 크게 상승했다.
한 편, 수도원장이라는 직책은 꽤나 바빴고, 멘델은 더 이상 연구활동에 전념할 수 없었다. 멘델은 동료 네겔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라고 열망을 드러냈지만, 수도원을 둘러싼 정치적, 경제적 이슈때문에 예전과 같은 연구를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멘델은 그 대신 날씨와 폭풍, 지하수, 태양의 흑점 등을 관측하며 새로운 학문적 관심거리들을 꾸준히 찾아 자료를 남기며 과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결국 멘델은 자신이 발견한 유전법칙이 과학계에서 인정받는 것을 보지 못하고 끝내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십 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3명의 각기 다른 과학자들이 멘델의 논문을 발굴했고, 이를 자신의 논문에 인용하면서 멘델의 유전 법칙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멘델의 유전 법칙 위에 20세기 유전학은 활짝 꽃피었다. 1915년 토마스 모건은 초파리 연구를 통해 유전자가 염색체 위 일정한 위치에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냈고, 1950년 왓슨과 크릭이 DNA의 구조를 발표하면서 DNA의 복제를 통해 유전형질을 전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크리스퍼'와 같은 유전자 가위 기술로 원하는 유전자를 찾아 쏙 빼서 붙여 넣을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늘 경제적 압박에 부딪혔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연구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멘델.
수도사라는 과학과는 다소 멀어 보이는 본업을 가졌었지만, 오랜 기간 끈기 있는 실험을 통해 자신만의 연구를 이루어냈다. 비록 당대 과학자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후세대 유전학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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