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일 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테넷'이 개봉했었다.
도무지 내용을 예측할 수 조차 없던 예고편 영상이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내 마음에 와닿았었다.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영화였던 것이다! 인터스텔라 개봉 전 까지만 해도 누군가 내게
'나는사람씨는 인생영화가 뭐에요?'
라고 묻는 족족,
'인셉션이지요!'
라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만큼, 인셉션이라는 영화를 감명깊게 보았었다.
한 번쯤 해볼만한 상상과, 현대 물리학 이론에 기초하여 충분히 있음직한 사건과 시나리오, 거기에 풍부한 사운드와 연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생각했다.
이후로 나온 '인터스텔라'를 보고나서는
'역시 놀란감독이야!' 하고 감탄했고, 이미 나는 놀란감독의 팬이 되어있었다.
그러다가 마주한 '테넷'이었다. 이미 감동받을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바로 극장으로 향했다.
영화를 다 본 후에 나는 반 쯤 넋이 나가 여운에 잠겼다.
심심할 때 한 번 쯤 생각해봤던 타임 패러독스에 관한 문제,
고등학교 물리시간에 잠깐 등장했던 '할아버지의 역설' 등 인터스텔라와 마찬가지로 현대물리학의 이론을 골자로 하여 짜여진 시나리오와 각종 장치는 정말 너무나도 흥미로웠다!!
시간여행이라는 주제는 정말 많은 작품의 주제로 등장하지만, 엔트로피의 역행이라니 이 얼마나 구체적이면서도 신선한 주제인가...
엔탈피의 방향성 또한 바뀌었기에, '인버젼'된 세계에서 폭발이 일어났을 때 온도가 급감하며 얼어붙는 연출을 보며 입이 떡 벌어졌다.
본격적인 후기(스포일러 주의)
마지막장면은 정말 감동적이면서도 슬프고 멋지다. 아마 영화관에 나 혼자 있었다면, 나도모르게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을 뻔 했다.(ㅋㅋㅋㅋ) 열린결말도 아닐 뿐더러, 여운이 짙고, 생각에 잠기게 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마지막 대사가 시.달.소의 '미래에서 기다릴게.'와 비슷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시간 여행을 작품속에서 하나의 장치로 사용했다는 점도 공통점이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비록 정해진 미래라고 해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그 미래를 얻어낼 수 있도록 해야한다.'
라는 주제의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테넷의 닐이 이미 세계멸망을 피한 현재 시점에서, 정해진 미래(자신의 죽음)를 피하지않고 받아들인다는 점과,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남자주인공(치아키)이 즐거운 현재 시점을 등지고 굳이 미래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다는 점이 비슷해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테넷의 마지막장면에, 주인공과 닐의 대화에서 정말 많은 점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주인공과 마지막 사토루의 세력과의 사투에서, 알고리즘 탈취 직전에 인버젼된 '닐'로 추정되는 누군가(인버젼되었기 때문에 방독면을 착용하여 얼굴은 알아볼 수 없으나, 가방에 달린 가방끈으로 추측할 수 있다.)가 잠긴 문을 열어주고 주인공 대신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알고리즘 탈취에 성공하여 세계의 멸망을 막은 현재 시점에서, 닐은 주인공이 마주했던 과거를 재현하기 위해 인버전한 후에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것이다.
주인공은 이 사실을 알고, 울먹이며 '다른 방법은 없어?' 라고 말한다.
하지만 닐은 단호하게, '없어, 이게 현실(Realization)이야.'라고 대답한다. 운명같은것이 아닌, 현실이라고.
영화 중반에 닐과 주인공이 '할아버지의 역설'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해답은 여기에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닐은 주인공에게
'만약에 과거로 돌아가서 할아버지를 죽이게 되면, 현재의 나는 어떻게 되는걸까?' 라는 물음을 던진다.
'어떻게 되는데?' 내가 하고싶은 말을 주인공이 대신 해준다.
'정답은 '모른다'야.'
여기서 닐의 생각, 신념을 알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가 할아버지를 죽인다면 현재의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렇지도 않게 할아버지를 죽인 후, 그대로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할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인과적으로 나는 존재할 수 없으니 바로 사라져버리는걸까? 할아버지가 죽은 후 새로운 미래에서 나는 이전에 '나' 그대로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세상에 맞춰 내 모습이 변화하는걸까?
닐의 신념으로 정답은 '모른다'이다.
모르기 때문에, 알고있는 미래를 향해 과거를 한조각 한조각 맞춰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된 미래라면, 적어도 '나'라는 존재가 살아있는것은 확실하지 않은가? 적어도 세상은 온전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알고리즘을 탈취하고 세상의 멸망을 막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과거로 돌아가 주인공 대신 죽음을 맞이하는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멸망하지 않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보자 마음먹는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지 '모르기' 때문에.
반대로, 알고리즘을 이용해 과거를 소멸시켜버리려는 미래 세력들의 신념은 이와는 다르다.
그들은 미래에 이미 황폐해진 지구를 두고, 과거 조상들의 잘못이기 때문에 이 조상들을 없애버린다면 자신들의 현재(즉, 미래)가 더 풍족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할아버지의 역설'과 동일한 상황이다.
알고리즘을 이용해, 과거의 조상들의 엔트로피를 뒤바꿔서 없애버린다면 그 결과는 역시 '모른다'겠지만,
그 알 수 없는 결과를 향해 나아갈 만큼 미래 사람들이 절박하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더해서, 현재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는 영화였기도 하다...
이러한 타임패러독스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작품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슈타인즈 게이트>라는 비디오게임이다.
이 작품 역시 타임 패러독스를 주로 다루며, 여기서는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이 과거를 바꿔버릴 경우 그에따라 미래가 새로 쓰여진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변 환경, 인물들이 바뀌어진 과거에 따라 전부 변해버리는 것이다.
테넷의 닐은 정해진 미래를 사수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과거의 조각을 맞췄지만,
위 작품 '슈타인즈 게이트'에서는 정해진 미래 역시 절망적이기 때문에, 주인공이 수없이 많은 과거개변을 하며 최선의 미래를 찾아가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개인적으로, 닐이 죽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꼭 닐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닐의 가방고리가 달린 가방을 들고, 인버젼하여 방독면을 쓰고 주인공 대신 총을 맞으러 간다면, 주인공의 입장에서도 닐의 입장에서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닐 대신 닐의 가방을 가지고 총맞고 죽으러가는 누군가는 납득 못하겠지만 말이다. ㅋㅋ
테넷은 이렇게 열린 결말이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생각에 빠질 수 있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동시에, 정해진 미래를 사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닐의 모습을 보며, 마치 인생과도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인생 역시 죽음이라는 정해진 미래가 있지 않은가? 그 속에서 고군분투 하며 우리는 행복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다소 두서없는 리뷰이지만, 여전히 테넷은 내 인생영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화를 3회차 해보았다. 오직 테넷을 보러 혼자 영화관을 3번 간 것이다.
여전히 나는 놀란감독의 팬이고, 누군가 인생영화를 물어본다면 주저없이 테넷이라고 할 것이다.